올해 1월 11일 우리는 또 한 명의 위대한 거장을 잃었다.
아흔번째 생일을 석달가량 남겨둔 채 에릭 로메르는 생을 마감한 것이다.
3년 전까지도 장편영화를 연출하며 노익장을 과시해 온 그였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가운데 한 명이자,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역임하기
도 했었던 에릭 로메르는 스스로를 '모럴리스트'라고 칭하곤 했었다.
“영어에는 '모럴리스트 (moraliste)'라는 프랑스 어 단어에 상당하는 말이 없다고 나는 생각
한다.
이 단어는 'moral'이라는 단어와 상당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럴리스트'는 인간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그는 정신과 감정의 상태에 관심이 있다.
예를 들면 18세기에 파스칼은 '모럴리스트'였으며, 라 브뤼예르 혹은 라 로쉐푸코와 같은 부
류의 프랑스 작가들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탕달도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묘사했기 때문에 '모럴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도덕이야기는 비록 이 영화들 속에 도덕이 있고 모든 캐릭터들이 상당히 분명하게 만
들어진 어떤 도덕 관념에 따라 행동한다 할지라도, 그 이야기 속에 도덕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서는 이러한 관념들이 상당히 정교하다.
다른 영화들에서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에 있어서 그 캐릭터들은 어느 정도는 보다 애매하고
도덕성은 보다 개인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고 애쓰는데, 이것은 가장 좁은 의미의
'모럴'이라는 단어에 들어맞는다.
하지만 '모럴'은 또한 그들이 자신의 동기들, 즉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유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은 분석하기 위해 애쓴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이
다.
그 영화들은 행동의 영화들, 즉 물리적인 행동이 일어나는 영화가 아니고, 매우 극적인 영화
도 아니며, 특별한 감정이 분석되고, 심지어는 캐릭터들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는 매
우 내향적인 영화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이다.”
위의 내용은 에릭 로메르 본인이 '모럴리스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즉, 에릭 로메르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를 창조하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의 영화는 지적인 수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인간에 대한 순수하고도 진지한 관찰을 통해 진리를 추구해 나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굴곡이 완만하지만 그 완만함 속에서 섬세하게 피어나는 감미로운
향기를 맛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을 '제2의 에릭 로메르'로 지칭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물론 전혀 다른 홍상수만의 색깔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둘 다 '모럴리스트'라는 공
통점이 있기에 어떤 궁극의 접점이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잔잔하지만 또한 너무나도 유쾌하다.
위대한 영화감독들